한국 유교가 꿈꾼 이상사회와 오늘의 공동체 문제

최영진 칼럼 | 최종편집 2017.12.23 1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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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진화포럼 117차 월례토론회] 2017.12.22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 회복 - 종교를 통한 공동체 운동 방안                     

최영진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율곡학회/한국주자학회 회장)

      유교의 이상적 공동체관             

1. 서론

  󰡔논어󰡕 「미자微子」편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공자孔子가 길을 가다가 제자인 자로子路를 시켜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게 하였다. 이들은 공자가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것을 비웃으며 “도도한 물결에 천하가 다 휩쓸려 가는데 그대는 누구와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자로가 그 말을 전하자 공자는 “새나 짐승과 함께 무리지어 살 수는 없으니 내가 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 살겠는가? 천하가 도가 있다면 내가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하였다.
  권력자들과 갈등을 빚고 은자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공자가 이 세상을 바꾸어 새롭게 만들려고 한 세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바람직한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유가에서 이상적으로 그리는 공동체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근세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은 유교를 이념으로 하여 작동하여 왔다. 특히 조선은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된 사대부들에 의하여 기획되고 건국되면서 유교적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것이 국가적 과제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적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의 병리현상을 분석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서 유교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진력하였다. 그러므로 유교의 이상적인 공동체관을 규명하는 것은 한국유학사상을 이해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 동아시아 사회의 심층에 유교적 사유와 가치관이 작동하고 있다고 할 때, 유교의 공동체관은 21세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념을 모색하는 데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2. 사회 운영의 두 가지 방법과 자율적 도덕공동체

  공자가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간파하였듯이, 우리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구성원의 일부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각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욕구와 욕구가 충돌하게 되며 이를 방치할 경우 그 공동체는 와해되고 만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구성원들의 역량을 결집하여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규칙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논어』에 나타나는 통치자의 리더십에는 강제적으로 피통치자를 복종시키는 유형과, 덕으로 피통치자를 감화시켜 스스로 따르도록 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것은 다음 구절에서 확인 될 수 있다.

법령[法制․禁令]을 가지고 백성들을 이끌며 형벌을 가지고 질서를 잡는다면 민民은 이것들을 면하려고만 하지 수치심은 없게 될 것이다. 덕을 가지고 이끌며 예를 가지고 질서를 잡는다면 민은 수치심을 갖게 되고 또한 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공자는 사회를 운영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하나는 ‘법과 형刑’으로 다스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덕과 예’로 다스리는 것이다. 법령[法制․禁令]은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규율하는 공동체의 규범이다. 법령을 어기는 공동체의 구성원에게는 폭력적인 형벌이 가해진다. 즉 힘으로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회를 이끌어 갈 경우에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수치심[恥]’을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공자 당시의 법은 백성을 통제하여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서 형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법은 본질적으로 ‘강제성’을 갖고 있는데, 형법은 법률 가운데에서도 가장 강력한 강제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외부의 강요에 의해 행위한 결과에 대하여 절실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기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정되어 국가 권력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하여 강행되는 법을 위반했을 경우 죄책감이나 수치심 등 도덕정감이 발동되기 어렵다. 공자는 법(특히 형벌)은 인간의 마음을 감화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치심을 마비시킨다고 보았던 것이다.
  수치심이 마비되면 외면적으로 형벌이 두려워 악한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내면적으로 악한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사회를 유지하고 이끌어 가기 위하여 더욱 강도 높은 법령과 형벌이라는 강제적이고 폭력적 수단을 요구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그 반대가 되는 방법이 덕과 예로써 다스리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공동체가 운영될 경우 그 구성원들은 잘못을 범하면 ‘수치심’을 느끼고 선하게 감화된다는 것이 공자의 견해이다.
  맹자는 “인간은 수치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 수치심이 없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면 치욕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수치심을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데에 필수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자기 자신이 부도덕한 행위를 했는데도 이것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선한 행위를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수치심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도록 만드는 내적 기제라는 소극적 기능에 그치지 않고, 넘어 자율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유발시키는 적극적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규범지향적 정감’이라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 시대 제후들은 백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성문법을 제정하였다. 이 경우 민은 통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은 ‘민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공자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다. 특히 공자는 물리적 폭력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는 “민을 도에 나아가도록 만들기 위해서 악한 자를 죽여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죽여서는 결코 안 된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주자는 이 구절을 주석하는 자리에서 ‘죽임[殺]’이라는 단어는 민을 위에서 다스리는 자가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민을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선한 목적이 ‘사형’이라는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유교에서 추구하는 ‘살기 좋은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각각 선천적인 도덕적 정감에 의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자율적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준수하고 공공의 선을 실현시켜 나가는 ‘도덕적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자는 구성원들의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경제력[足食]’ ‧ ‘군사력[足兵]’이 필수적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信]’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에 통치자의 도덕적 감화력과 자신의 과도한 사적인 욕망을 절제하여 한정된 가치를 공정하게 분배[均分]할 수 있는 역량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핵심 기제라고 할 수 있다.


3.공동체 운영의 주체
 
          
   󰡔논어󰡕에서 정치의 궁극적 목적인 ‘백성을 편안하게 함[安民]’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닦음[修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에서는 ‘수기’의 방법으로 ‘밝은 덕을 밝힘[明明德]’을, ‘안민’의 방법으로 ‘민을 새롭게 함[新民]’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조목으로 여덟 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명덕과 친민의 주체는 대인이다. 대인은 자신의 선천적 도덕심을 밝혀 회복하고 이를 토대로 집안과 국가와 세계를 교화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천하를 화평하게 함[平天下]’으로 알고 있는 8조목의 마지막 단계가 󰡔대학󰡕 1장에서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힘[明明德於天下]’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이 제시하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이 선천적으로 본유하고 있는 본래적 도덕심을 회복하여 화평하게 된 사회라는 점이다. 위정자는 솔선수범하여 민의 도덕적 정감을 감발시키는 교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수신의 주체는 위정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두 수신으로 근본을 삼는다.
 
  ‘수신’은 ‘명명덕’의 마지막 단계이다. 이것은 ‘민을 새롭게[新民]’할 수 있는 주체의 능력이 완비된 단계를 의미한다. ‘서인도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라는 말은 정치의 객체인 민이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 근거를 황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천자와 서인은 귀천이 같지 않지만 균등하게 인간이 되니 수신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고대 국가는 ‘천자天子-제후諸侯-경卿-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의 여섯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각 계층마다 귀천이 다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두 균등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동일한 도덕적 본성과 정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균등한 도덕성을 본유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체적으로 수신할 수 있으며 수신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대학󰡕 <신민新民> 조에 인용되어 있는 󰡔서경󰡕 「강고康誥」편의 “새로워지는 민을 진작하라.”라는 구절에 대하여 주자가 ‘스스로 새로워지는 민을 진작하는 것’이라고 주석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자의 이 주석은, 민은 단순히 대인이 새롭게 만들어 주어야 할 객체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수신’한 자, 즉 덕을 밝힌 민은 민을 편안하게 하고[安民], 새롭게 할 수 있는[新民] 주체, 곧 도덕공동체를 운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4. 도덕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

󰡔대학󰡕의 8조목과 유사한 구절이 󰡔중용󰡕 22장에 나온다.

 오직 천하에 진실한 자만이 그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할 수 있다. 그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할 수 있으면 사람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할 수 있고, 사람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할 수 있으면 사물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할 수 있고, 사물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와 줄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와줄 수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삼재三才가 될 수 있다.

  ‘오직 천하에 진실한 자만이 그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할 수 있다’는 대학의 ‘명명덕(‘격물’에서 ‘수신’까지)’에 해당한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하다’는 ‘신민(‘제가’부터 ‘명명덕어천하’까지)’ 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인 ‘사물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한다.’와 ‘천지의 화육을 도와주어 삼재가 된다.’는 8조목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학󰡕이 ‘천하’라는 인간계에 한정되어 있다면 󰡔중용󰡕은 ‘천지’라는 자연계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자기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한다.[盡己之性]’라는 것은 군신 간에 있어서는 의롭게 하는 것이며 부자 간에 있어서는 친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한다.[盡人之性]’라는 것은 ‘여러 백성들이 감화되어 모두 화합한다.’라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한다.[盡物之性]’라는 것은 ‘새와 짐승과 물고기와 자라까지도 모두 자기의 본성대로 살았다.’라는 것이다.

  이 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중용󰡕은 자연물까지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중용󰡕 수장의 “중화를 모두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진다.”라는 구절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도덕정감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이 수양하여 도덕 정감을 엄폐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인용한 『중용』22장에서 지극한 진실함[至誠]을 가지고 자기의 선한 본성을 남김없이 실현한 자만이 타자[인간과 사물]에게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 생명을 무고하게 해치지 않고 자연물들과 공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생기가 오르는 봄에는 차마 나무를 베지 못하고, 지나치게 촘촘한 그물을 사용하여 치어까지 잡아들이지는 않으며, 자는 새는 쏘지 않고 사냥을 할 경우 사방을 모두 막지 않고 한 곳은 터놓는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사이 모든 생명체들이 각각 자신의 본성을 남김없이 꽃피워 우주적 조화를 이루는 것이 유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이상적 공동체이다.

5. 결론

  유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각각 도덕정감에 의하며 자신들의 욕구를 적절히 통제함으로서 자율적으로 질서를 준수하고 공공의 선을 실현시켜 나가는 ‘도덕적 공동체’이며, 하늘과 땅 사이 모든 생명체들이 각각 자신의 본성을 남김없이 꽃피워 우주적 조화를 이루는 ‘생명공동체’이다. 이와 같은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핵심적 기제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 ‘생명체가 죽어가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 이라고 하는 인간의 선천적 도덕정감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자기의 과도한 사적 욕망을 절제하여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인간이 본유하고 있는 이 정감이 자발적으로 감흥 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공자는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 점은 『논어』의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공자가 위나라에 갈 때에 염유가 수레를 몰았다. 공자가 ‘민이 많구나.’라고 말했다. 염유가 ‘민이 많은 다음에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부유하게 해 주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염유가 다시 ‘부유하게 한 뒤에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민이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하는 데에는 경제적 토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동물적 삶과 구별되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도덕적 행위규범과 윤리적 정당성이 무엇인가를 교육시켜야 한다. 공자가 “가르치는 데에 구별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인간에게 교육이 가능하다. 교육에 의하여 ‘스스로 새로워진 민’ ‘수기修己된 서인庶人’은 도덕적 이상세계를 건설할 의무와 능력을 갖고 있다. 유교적 이상세계는 ‘도덕공동체’ ‘생명공동체’인 동시에 ‘교육공동체’인 것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민의 도덕정감은 통치자[성인 ․ 군자 ․ 대인]의 교화에 의하여 감발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자연물의 본성을 인간중심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가 ‘폭력으로 타자를 복종시키는 야만적 스트롱맨의 시대’로 치닫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이념을 모색하는 데 ‘나와 너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꿈꾸었던 유교의 이상은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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