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략가 이승만의 통일 전쟁 - 월남전과 비교 [제74회 이승만 포럼] 발표 전문

남정옥 칼럼 | 최종편집 2017.04.19 11: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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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회 이승만포럼>

2017. 4. 18(목) 오후2:30~4:30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강의실 220호

국제전략가 이승만의 통일전쟁

-월남전과의 비교-

               

남정옥(건국이념보급회 이사, 문학박사)

                                     

Ⅰ. 머리말

Ⅱ.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전쟁목표로 삼았으나, 월남 지도자들은 체제안정에만 힘썼다

Ⅲ. 이승만은 어려운 상황에도 끝까지 항전했으나, 월남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Ⅳ. 이승만은 작전통제권을 이양했으나, 월남은 그렇지 못했다

Ⅴ. 이승만은 국익에 관해서 결코 양보하지 않았으나, 월남의 국가지도자는 그렇지 못했다

Ⅵ. 맺음말


Ⅰ. 머리말

  6·25전쟁과 월남전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거의 흡사하다. 두 전쟁 모두 남북으로 분단된 공산주의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 사이에 이데올로기를 저변에 깔고 수행된 전쟁이었고,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월맹(북베트남)은 소련 및 중국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과   월남(남베트남)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대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체제전쟁’이기도 했다. 전쟁수행과정에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결국에는 휴전협상을 통해 전투행위를 종결했던 것도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너무나 흡사했던 ‘닮은꼴 전쟁’이었다. 월남전에서 지휘봉을 잡고 진두지휘했던 미국의 맥나마라(Robert McNamara) 국방부장관의 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전쟁은 벌써 월남의 승리로 종결됐어야 했다. 그만큼 미국은 월남전에 막대한 전력과 병력을 투입했다. 6·25전쟁에 비해 최대 투입병력은 625,866명으로 2배에 달했고, 사상자수는 205,023명으로 6·25전쟁에 비해 거의 2배에 이르렀다. 월남전에 들인 미국의 전쟁비용도 2009년 기준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500억 달러로 천문학적 규모였다. 이에 비해 미국이 6·25전쟁에 들인 비용은 6,910억 달러(당시 670억 달러)로 다소 많으나, 여기에는 유엔참전 21개국에 대한 지원도 포함됐다. 

  그런데 전쟁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똑같이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은 살아남았던 반면, 월남은 공산화와 함께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월남군은 월맹군에 비해 병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전차와 전투기는 월등하게 우위를 차지했는데 왜 ‘무조건 항복’했을까? 당시 월남과 월맹의 전투력은 월남이 단연 우세했다. 병력(월남 110만, 월맹 110만), 전차/장갑차(월남 1,800여대, 월맹 600여대), 항공기(월남 1,270대, 월맹 342대), 헬기(월남 500여대, 월맹 0), 함정(월남1,500여척, 월맹 39척)으로 병력을 제외한 무기 및 장비 면에서 월남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또 월남 장교들은 대한민국 장교들처럼 똑같이 미국식 교육과 훈련을 받았는데, 결과는 참담한 군사적 패배 뒤에 따른 월남의 패망이었다. 

  그렇다면 월남의 패인은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전투력 측면에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군사력을 월남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참하게 졌다. 일부학자 및 군사전문가들은 월남패인을 미국의 전쟁지도 실패 등에서 찾으려고 하나,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물론 미국의 책임도 부정할 수 없으나 근본적인 책임은 월남내부에서 찾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월남전은 미국의 지원이라는 외형적인 조건에서 볼 때 6·25전쟁과 비슷한 과정을 걸쳤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살아남았고, 월남은 패망했다. 답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왜 그랬을까? 

  이 글에서는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 있다. 6·25전쟁 때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미8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케네디(John F. Kennedy) 정부 시절 합참의장을 역임했던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월남이 패망한 후 테일러 장군은 “월남에 대한민국의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가 있었더라면, 월남은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테일러 장군은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월남전에 관한 한 테일러 장군의 발언은 자연히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테일러 장군은 미8군사령관을 거쳐 미 극동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차례로 역임하고 퇴역했다. 그런데 케네디 행정부 시절 테일러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합동참모의장을 맡았다. 미군으로서는 매우 의례적인 인사였다. 미군에서는 전시가 아닌 평시에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테일러를 합참의장으로 발탁한 것은 순전히 월남전 때문이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할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 바로 테일러 장군이었다. 케네디가 테일러를 발탁한 배경이다. 그 후 테일러는 월남주재 미국대사와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의 안보자문위원으로서 월남전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런 월남전이 결국은 월남의 패전으로 끝났으니 군인인 그로서는 회한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이 바로 전시 국가지도자의 역할이었다. 그런 테일러이기에 그의 말에는 신뢰가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로 사실일까? 과연 테일러 장군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것인가? 이 글에서는 그런 사실에 주목하고 6·25전쟁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 국가지도자로서의 역할과 월남전에서 ‘자유월남’ 지도자들의 역할을 통해 이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어떻게 전쟁을 지도했기에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었고, 월남의 국가 및 군사지도자들을 어떻게 처신했기에 100만의 대군과 천 여 대가 훨씬 넘는 전차와 항공기를 보유하고도 불과 1개월 만에 ‘월맹’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호 비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전쟁목표로 삼았으나, 월남 지도자들은 체제안정에만 힘썼다

  6·25전쟁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월남전에서 고 딘 디엠(Ngo Dinh Diem) 및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 대통령을 비교해 봤을 때, 왜 월남이 패망했는지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양측의 지도자들은 전쟁목표와 전쟁 해결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통일을 위한 북진통일을 처음부터 주장한데 반해, 월남의 대통령들은 ‘체제안정’을 전쟁목표로 삼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이 도와줄 때 힘을 합쳐 38선 이북으로 북진하여 통일을 이룰려고 했고, 월남의 국가지도자들은 17선 남쪽의 월남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의 안정만을 추구했다. 미국이 철수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항상 도와줄 것으로 여겼다.  

  월남은 전쟁기간 내내 ‘특이한 전쟁’을 수행했다. 17선 이북에 있는 공산 월맹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월남내의 공산게릴라들인 베트콩(6·25전쟁 당시 빨치산과 같은 존재)과 월남영토로 침투해온 월맹의 정규군(6·25전쟁 때 북한인민군과 같은 존재)과 싸웠다. 엄밀히 말하면 국경지역에서 정규군끼리 정규전 방식의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6·25전쟁 때 국군과 경찰이 후방지역의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것과 같은 소탕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다보니 월남의 전쟁목표는 이승만 대통령처럼 17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통일전쟁이 아니라, 월남내의 공산 게릴라 및 월남에 침투한 월맹군을 격멸해 나가는 ‘체제안정을 위한 소극적인 전쟁’으로 일관했다. 다만 17선 이북의 월맹지역에 대해서는 미국이 필요할 때마다 압박용 수단으로 폭격을 몇 차례 단행했지만, 17선 이북은 6·25전쟁 때 중공군의 힘의 근원지 역할을 했던 만주처럼 성역화 됐고, 월남 내에는 베트콩들이 장악한 ‘해방구’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이는 마치 표범의 검은 무늬처럼 월남 영토를 점차 잠식해 들어갔다. 그럼에도 월남 지도자들의 대응방식은 마치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이었다. 이는 누가봐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됐다. 전투에서 이기면 현상유지였고, 지면 그만큼 월남내 해방구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군대도 지역별로 나누어 운영했다. 우리의 휴전선에 해당하는 곳에 병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고, 베트콩 소탕을 위해 월남 지역에 골고루 분산, 배치됐다. 행정적 부대배치였다. 그러다보니 군대는 점차 무사안일주의에 빠졌다. 자기들의 전쟁이면서도 그렇게 인식을 하지 못했다.      

  월남의 국가지도자들은 ‘체제안정’을 위해서라도 북진통일을 주장해야 했다. 월남군도 이를 통해 강력히 결속해야 했다. 17선 이북의 월맹군을 그대로 남겨둔 채 자국 내의 베트콩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호치민루트(Ho Chi Minh Route)’를 통해 침투해온 월맹군 토벌에 전력을 쏟았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수세적 입장에서 싸운 월남은 결국 공세로 나온 베트콩과 월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월남은 정작 주적인 월맹정규군과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월맹군의 결정적인 공격 앞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맥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러면 이승만 대통령은 어땠는가? 북한이 남침하자 전쟁 당일 이승만은 전쟁목표를 ‘통일’로 정하고, 전쟁기간은 물론이고 1960년 자신이 대통령 직에서 하야할 때까지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북한이 남침한 당일인 1950년 6월 25일 이승만은 주한미국대사 무초(John J. Muccio)를 경무대로 부른 후, 이 위기를 이용하여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전쟁당일 이미 통일을 전쟁목표로 세워놓고 있었다. 이승만은 무초에게 지금의 위기가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할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의 ’통일 운운‘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파죽지세로 밀리는 상황에서 무초가 보기에는 현재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할 정도로 엉뚱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전쟁당일부터 통일문제를 꺼내들고 나섰다. 이는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가 먼저 38선을 파기했으니 이 참에 통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국가의 장래와 국제정세의 판을 정확히 읽지 않고는 도저히 내릴 수 없는 판단이었다.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고 현 상황을 전쟁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아도 대단한 일일 것인데, 이승만은 통일이라는 우리나라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의 지도자들보다 한 걸음 앞서 생각하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이승만은 2차대전시 전시연합국이자 4대 강국인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합의한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38선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어쨌든 ‘국제적 합의선’이라는 점에서 무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38선을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가 먼저 파괴하고 남침했으니, 이제 38선은 무용지물이 됐고, 대한민국은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받아 북진통일을 할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요청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전쟁 진행과정에서, 적어도 서울이 함락된 후에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북한을 이길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반드시 미국과 유엔의 도움이 있어야 이 전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과 유엔의 원조에 매달렸고, 결국 이를 실현에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돕겠다는 미국과 유엔의 대한정책은 ‘전쟁이전 상태의 회복’이었다. 다시 말해 38선을 넘어 남침한 북한군을 다시 38선 이북으로 쫓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38선은 폐기됐다고 주장하면서 북진통일을 해야 된다며, 도움을 받는 국가가 도움을 주고 있는 미국과 유엔을 향해 정치적 공세를 펼쳤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결국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미국과 유엔의 전쟁정책으로 채택됐다. 미국과 유엔은 전쟁이전 상태의 회복이라는 종전의 전쟁정책을 폐기하고, 한반도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한국정부를 수립한다고 공표했다. 이는 이승만이 바라고 원했던 바였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일부터 38선 돌파하고 한만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돌진했다. 

  비록 중공군 개입 이후 미국과 유엔의 한반도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전쟁이전의 상태의 회복이고 장기적으로 통일한국정부 수립”으로 다시 조정됐지만, 이승만이 주장했던 통일정책은 여전히 골격을 유지하며 존재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전쟁기간은 물론이고 전쟁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대미압박카드로 유용하게 활용됐다. 

  북진통일은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 그리고 국군의 전쟁목표이자 군사목표가 됐다. 국회도 국민들도 여기에 이의가 없었다. 정쟁(政爭)으로 싸우더라도 국가안위가 달리는 문제가 불거지면 한 목소리를 냈다. 바로 북진통일이었다. 나아가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미국의 휴전정책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은 죽기 살기로 휴전을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졌다. 여기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상이군인도, 남편과 자식을 잃은 부모와 미망인도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국군장병들도 국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받들었다.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시켜 북진통일을 완수하겠다며 호기까지 부렸다. 그렇지 않고는 미국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판이었다. 이른바 이승만식 ‘벼랑 끝 전술’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이 몸을 사리며 주저주저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도 밀어부처 타결시켰다. 

  그런데 월남의 국가지도자들은 전쟁에 대한 목표도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국가적 비전(vision)도 제시하지 못했다. 전쟁은 그들이 수행해 될 절대적 명제임에도 마치 남의 일처럼 뒷짐을 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전쟁은 미군과 한국군 등 우방국 군대가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국민들은 전시임에도 평시처럼 철없이 행동했다. 비록 생각은 그렇더라도 행동까지 그렇게 된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더욱이 월남정부의 관료와 군은 무능했고 부패하기까지 했다. 월남 지도자들의 족벌 독재체제와 군부의 무능이 그 중심축에 놓여 있었다.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에 대한 국가전략도 군사적 고민도 없었다. 어제도 괜찮았으니 오늘도 내일도 괜찮을 것이라는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했다. 국가의 장래는 뒷전이고, 내 가족 챙기는 것이 더 먼저였다. 월남의 지휘관 및 장교들이 전투할 때 차량에 전투장비를 적재하지 않고, 전투차량으로 먼저 그들 가족부터 피난시켰다. 그런 군대가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이처럼 월남에는 이승만과 같은 국제역량을 갖춘 걸출한 국가지도자도, 전쟁에 이길 전쟁목표나 국가전략도 없었다. 월남이 패망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Ⅲ. 이승만은 어려운 상황에도 끝까지 항전했으나, 월남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6·25전쟁을 통해 이승만은 여러 번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수도 서울이 함락될 때도 그랬고, 미군이 참전함에도 계속해서 낙동강으로 밀려날 때도 그랬다. 전 국토의 5%만 남은 낙동강전선에서는 거의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중공군 개입 이후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내주고 끝없이 밀려나던 1·4후퇴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한 공포로 전의를 잃은 채 공황상태에 빠졌고, 워싱턴과 유엔도 휴전을 모색하며 일본으로의 철수를 거론했다. 대한민국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어려울 때였다.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는 대한민국의 해외 망명정부 수립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여기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망명정부를 권하던 무초 대사를 향해 권총을 뽑아들며 “공산군이 오면 이 총으로 싸우다가 마지막 한 발이 남으면 자결하겠다.”고 일갈(一喝)했다. 놀란 무초 대사는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전선이 위험에 빠지자, 미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은 육해공군총사령관 정일권 장군에게 극비라면서 ‘한국정부의 이전’을 들먹였다. 뒤늦게 정일권으로부터 보고받은 이승만은 “워커를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겁쟁이라면서 갈 테면 가라고 했다. 우리는 끝까지 남아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우겠다.”며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조국 대한민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행동이었다. 대통령의 그런 의지와 각오는 군은 물론이고 국민들에게 널리 전파됐음은 물론이다. 대통령의 그런 결의는 국민들과 군이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대통령을 믿고 끝까지 싸울 수 있게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나자 비서관에게 부탁해 권총 한 자루를 구해달라고 해서 늘 지니고 다녔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공산군이 몰려오면 이 총으로 몇 명을 쓰러뜨리고 나서 자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서 “이 권총은 우리를 천당으로 데려다 줄 천국행 티켓”이라고 했다. 그때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국가를 위한 대통령의 안쓰러운 모습에 눈물을 훔쳤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불굴의 국가지도자였다. 

  그런데 월남의 국가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월맹군이 한 번 공격을 하자 도미노 게임에서의 카드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제일먼저 대통령부터 버텨내지 못했다.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월맹군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지게 되자, 티우 대통령은 대통령 직을 과감히 사임하고 그날로 망명했다. 월맹의 모략선전에 넘어간 것이다. 월맹은 사이공 공격을 앞두고 “티우 대통령이 사퇴하고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 집권하면 민 장군과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꼬임에 넘어갔다. 사이공 함락 9일을 남겨 둔 1975년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은 부통령 후옹(Huong)에게 대통령 직을 인계하고 사임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망명길에 나섰다. 무책임해도 너무나 무책임한 국가지도자의 못난 뒷모습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사임한 뒤 월남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하다. 그 대통령에 그 부하들이었다. 후옹 부통령이 1주일만인 4월 27일에 사임하자, 그 다음날인 4월 28일 월맹이 선전할 때마마 거론했던 민 장군을 대통령에 추대했다. 민 장군은 대통령에 취임하자 월맹측에 협상을 제의했으나, 월맹군은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군사적 공세만 퍼부었다. 민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한 날까지 월남군은 수도인 사이공 방어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사이공 방어에 7개 사단이 투입돼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웬 날벼락인가! 월남군을 총지휘하던 합참의장 비엔(Cao Van Vien) 장군이 미 대사관에 들어가 군복을 벗어던지고 헬기를 이용하여 미군 함정으로 도망쳤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로 합참의장이 된 로크(Vinh Loc) 장군을 비롯하여 전쟁을 지휘할 합참의 장군급 참모들이 모두 도망쳤다. 100만을 자랑하던 월남군은 그렇게 지휘부부터 어이없이 무너졌다. 세계 4위의 군사대국을 자랑하던 월남군의 최후 모습이었다. 

  월남공화국의 최후가 목전에 다가왔다. 마침내 민 대통령은 월맹군이 협상에 응하지 않자, 1975년 4월 30일 10시 20분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항복을 선언했으니 이를 전군(全軍)에 하달해야 되는데 하달할 군 책임자가 없었다. 수소문해보니 별 하나인 한(Nguyen Huu Hanh) 준장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대통령의 항복발표에 따라 한 준장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월남군을 향해 “월맹군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그나마 장군 한 사람이 남아 있어 월남군 지휘부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항복을 전군에 지시한 한(Hanh) 준장은 월맹군의 프락치였다. 월맹군 앞잡이가 월남군을 향해 월맹군에게 항복하라고 했으니 희극도 그런 희극이 없었다. 월남은 국가지도자부터 군부에 이르기까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월남에는 기강도, 기율도, 애국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국가가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월남이 패망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Ⅳ. 이승만은 작전통제권을 이양했으나, 월남은 그렇지 못했다

  월남전에서 월남은 60만명에 달하는 미군을 파병하고 막대한 무기와 장비를 지원한 주월미군사령관에게 작전통제권을 위임하지 않았다. 월남전에서 싸운 미군과 한국군은 월남군과 독립적인 관계에서 각자의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며 전쟁에 임했다. 작전지역은 월남군 4개 군단이 월남 전 지역을 분할하여 맡았고, 미군과 한국군은 이들 월남군 군단지역에 분포되어 각자 싸웠다. 이른바 단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작전지휘권이 분할된 상황이었다.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C. Westmoreland) 장군은 월남사람이 남의 지배받는 것을 싫어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미국의 입장일 뿐이다. 단일 전장에서 작전권이 단일 사령관에 통합되지 않은 군사작전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각국의 사령관이 자국의 피해를 줄이고자 보다 안전한 지역에서 안전한 전투를 하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월남에서 작전은 그렇게 각국이 안전하게 수행했다. 위험한 작전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쉽고 이길 수 있는 전투, 피해가 적은 소규모 전투 위주로 실시했다. 작전권이 통일되지 못한 느슨한 형태의 연합작전이 가져온 결과였다. 6·25전쟁에서 나타난 인천상륙작전이나, 유엔군의 대반격작전 같은 대규모 작전은 거의 없었다. 전투가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이 계속됐다. 그러다 지친 미군이 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철수했다. 주월미군은 미련 없이 홀가분하게 떠났다.  

  이것이 바로 월남의 커다란 실수였다. 월남의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 또는 합참의장은 주월미군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이양하든지, 아니면 한미연합사령부와 같은 별도의 통합사령부를 설치해서 지휘관에 미군사령관을 임명하고 월남에 대한 작전계획을 통일하여 수립하고, 월맹에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월남의 국가지도자나 군부지도자들의 머릿속에는 체제안정을 위한 생각만 들어있었다. 그러다보니 전쟁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17선 이북으로의 공격작전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월남 내의 공산 게릴라 토벌에 막대한 전력과 비용을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목적 잃은 전쟁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사이공이 월맹군과 베트콩의 공격을 받게 되자, 군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군 최고지휘관인 합참의장은 해외로 도망가기 바빴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다. 1950년 7월 14일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지체없이 이양했다. 북한이 남침한 지 20여일이 지난 시점이었고, 유엔에서 유엔군사령관을 임명한지 2주일 지나서였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왜 그렇게 빨리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 장성이 맡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당시 대한민국이 유엔회원국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함으로써 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떳떳이 싸우게 하는데 있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6·25전쟁은 유엔의 전쟁이라는 책임감을 주고 작전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승만의 그런 조치에 미국도 환영하고, 유엔도 환영했다.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문서는 유엔문서로 처리되어 등록됐다.

  유엔군사령관은 한국군은 물론이고 참전 유엔회원국 군대를 통합 지휘했다. 전투부대 16개국에 의료지원국 5개국 여기에 한국군을 포함해서 22개 군대를 모두 지휘했다.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임무수행이 어렵거나 지형이 힘들다는 것은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지상 작전을 위임받은 미8군사령관은 승리를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했고, 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다른 유엔파병 국가들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전투에 승리할 수 있는 부대를 선정해서 투입했다. 모든 것이 승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다보니 전투편성부터 융통성이 있었다. 미국 군단편제 속에 한국군 사단이 들어갔고, 한국군 사단 속에 미군 부대들이 들어와 지원했다. 또 미군 속에는 한국군 병사들이 미군과 함께 침식을 같이하며 전투했다. 이른바 카투사(KATUSA)다. 카투사가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은 병력이 부족했다. 상륙작전에 투입될 미7사단은 병력이 부족해서 사단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카투사 8천6백명을 보충 받고서야 비로소 인천상륙작전에 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 보완관계였다. 미군 속의 한국군은 지리에 밝고 주민들과 말이 통해서 작전을 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군과 한국군은 전투를 통해 피를 나누는 혈맹의 전우로 변해 갔다. 카투사는 지금도 한미동맹의 주요 요소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월남전에서 미군과 월남군은 달랐다. 서로 독립된 작전을 하다보니 쉽게 정이 들지 않았다. 연대감도 없었다. 모든 것이 사무적이었다. 군 수뇌부들끼리는 어느 정도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지 모르나 전투원끼리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러다보니 월남군에 대해서는 전우라는 애틋한 정이 부족했다. 그 과정에서 월남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처럼 미군 지휘관들을 챙기지도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시간만 나면 말과 행동으로 북진통일을 주지시켰고, 진정한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이승만과 함께 전쟁을 수행했던 미군 지휘관들은 모두 한 번씩 곤욕을 치렀다. 워커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왜 후퇴만 하느냐는 핀잔을 들었고, 리지웨이 장군은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고, 클라크 장군은 반공포로석방으로 뒤통수를 맞고 혼쭐이 났다. 그렇지만 이들 미군 지휘관들은 이승만을 이해하며 존경했다. 왜 이승만이 그런 언행을 보이는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승만이 자신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무한한 애국심과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움했던 마음이 점차 존경하는 마음으로 번해 갔다. 밴플리트 장군은 퇴역 후, 웨스트포인트 동기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할 것을 권유했으나, 자신의 임무가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설득하라는 것을 알고, 대사직을 거부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는 것을 뻔히 알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사로 갈수 없다”고 했다. 월남전에는 밴플리트 장군과 같은 그런 미군 지휘관도 없었고, 이승만과 같은 월남 대통령도 없었다. 작전지휘권 이양에는 이승만의 애국심에서 나온 다양한 정치적, 군사적 포석이 짙게 깔려 있었다.     


Ⅴ. 이승만은 국익에 관해서 결코 양보하지 않았으나, 월남의 국가지도자는 그렇지 못했다

  1973년 월남은 굴욕적인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른바 평화협정이다. 국가지도자라면 서명하지 말았어야 할 ‘망국(亡國)으로 가는 협정’이었다. 협정 대상은 월남과 미국 그리고 월맹과 베트콩을 대표하는 월남임시혁명정부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월남, 월남임시혁명정부, 중도파 등 3개 세력으로 구성된 ‘민족화해단결협의회’를 만들어 월남의 정치적 장래가 담겨 있는 총선거와 절차와 방법 등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협정 조인 60일 내에 미군을 비롯한 자유우방국 군대를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월남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미국은 웜맹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월남에 군사개입이나 국내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협상과정에서 티우 월남 대통령은 미국이 가져 온 협상안에 반대했다. 그러자 미국은 월남이 끝까지 거부하면 미국 단독으로라도 추진하겠다며 협박성 회유와 함께 군사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이에 티우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월남의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티우 대통령은 전후 보장이 없는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월남이 협상안을 받아들이면서 평화협정안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73년 1월 23에 가조인됐고, 4일 후인 1월 27일에는 유엔사무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협정안이 조인됐고, 다음날인 28일에 협정이 발효됐다. 

  평화협정이 조인될 당시 월남에는 베트콩은 물론이고 월맹 정규군도 버젓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철수는 전혀 거론되지 않고, 미군과 자유우방국인 연합군만 철수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월남 내에는 베트콩과 월맹군이 지배한 지역이 ‘표범의 검은 무늬’처럼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이른바 월남의 통치력이 미치는 못하는 해방구였다. 이를 두고 월남 합참의장으로 사이공 함락을 앞두고 도망쳤던 비엔 장군은 협정 당시의 상황을 빗대어 “지금까지 우리는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정글 속으로 들어갔으나, 이제는 그들을 품에 안고 함께 잠자게 됐다.”며 파리 평화협정을 꼬집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것을 뻔히 알고도 평화협정에 승인한 국가지도자 및 군부지도자들에게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며 바랄 것인가?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휴전협상에 대노(大怒)했다. “휴전은 한국민에 대한 모욕이며 대한민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대통령의 뜻을 알고 국민들은 총궐기했다. 그리고 미국이 감히 수용할 수 없는 휴전조건을 내걸었다. “중공군을 철수한다. 북한군을 무장해제한다.” 그러면 한국도 휴전을 고려해 보겠다. 이것은 미국도 유엔도 중공군도 북한도 들어줄 수 없는 ‘억지조건’이었다. 이승만은 그것을 알고 들이밀었다. 이승만은 “당신들에게 휴전조건이 있다면 나도 휴전조건이 있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정부의 휴전조건을 무시하며 미국위주의 휴전협상을 강행했다. 이승만도 거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당신들은 모든 유엔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누구에게 싸워달라고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의존한 것이 실수다. 이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력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행동으로 나섰다. 미 국무장관 덜레스(Foster Dulles)의 말처럼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미국의 등에 칼을 꽂았다. 워싱턴도 놀라고, 베이징도 평양도 놀랬다. 

  미국은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면서도 이승만 회유작전에 나섰다. 미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을 대통령 특사로 임명하고 서울로 급파했다. 이승만은 1953년 6월 26일부터 7월 12일까지 경무대에서 로버트슨과 설전을 벌였다. 말이 설전이지 이승만은 로버트슨을 갖고 놀았다. 이승만의 밀고 당기는 전략에 로버트슨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로버트슨은 이승만에게 꼼짝을 못했다. 결국 이승만의 요구대로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제원조, 20개 사단 증강을 약속받았다. 대신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이승만의 국가의 장래와 민족을 위한 노력으로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살아남게 된 결정적 이유다. 이승만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우리 전체의 생명과 희망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달려 있다.”고 했다. 월남의 지도자들도 이승만처럼 국가의 장래를 위해 미국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투쟁했어야 했다. 그런데 월남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월남이 패망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Ⅵ. 맺음말

  이승만과 월남은 모두 자국에서의 전쟁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살려냈고, 월남의 지도자는 국가를 패망으로 이르게 했다. 월남도 이승만과 같은 국제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 국가지도였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월남은 무능하고 부패한 국가 및 군사지도자들 뿐이었다. 월남이 패망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들이다. 월남은 월맹과 베트콩이라는 외부의 적 보다는 무능과 부패 그리고 무사안일이라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서서히 무너지다가 그동안 버팀목 역할을 해왔던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자유우방국 군대가 일제히 철수하자, 월맹군의 단 일격에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월남의 100만 대군이 전투다운 전투한 번 못하고 어이없게 자멸(自滅)했다.  

  이승만은 남침직후부터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고 접근했다. 여기에는 국제정치학자로서 국제정세를 뛔뚫어 보는 전략적 혜안(慧眼)이 있었다. 그리고 다년간 미국사회에서 있으면서 미국외교정치의 흐름과 메카니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기간 이승만은 워싱턴의 정책지도자들보다 먼저 생각하고 앞서 행동했다. 이승만의 그런 행동에는 언제나 철저한 계산이 숨겨 있었다. 이승만이 던진 낚시에 걸리면 누구든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만큼 이승만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옮겼다.   

  북진통일과 작전지휘권 이양도 그런 점에서 봐야 된다. 여기에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 당일 이승만은 남침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전선이 밀리던 1950년 7월에 38선을 북한이 먼저 파기했으니 북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눈앞에 기회로 다가오자 국군을 향해 38선 돌파를 명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눈치를 보거나 주저함이 없었다. 국군수뇌부가 그런 국군통수권자의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인들은 열심히 싸우기만 하면 됐고, 정치적 부담이 되는 뒷일은 대통령이 모두 떠안았다. 반공포로석방 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에 대해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유엔군사령관과 미8군사령관의 항의전화를 받고 밤중에 경무대를 전화를 건 백선엽 육군총장에게 “대통령이 했다”하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북진통일은 미국이 한국정부 몰래 휴전협상을 추진할 때도 유용하게 써먹었다. 이승만은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하고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미국을 윽박질렀다. 내가 준 작전지휘권이니 다시 거둬 오겠다는 것이었다. 유엔군사령관은 그런 이승만에게 쩔쩔맸다. 이승만은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2만7천명의 반공포로를 단독으로 석방했다. 그런 이승만을 보고 워싱턴이나 미군지휘관들은 이승만의 계산된 다음 행동에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과 북한군 수뇌부도 긴장했다.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이승만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모든 협상은 이승만이 주도권을 잡고 진행했다. 그렇게 얻은 것인 미국이 그렇게 하기 싫어 미적대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휴전협상을 해야 될 입장에 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 입장에서는 이승만을 그렇게 달랬다. 한미동맹은 오늘날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이승만은 비록 최선인 북진통일을 중공군 개입으로 이루지 못했으나, 차선책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다. 휴전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월남전에서 월남에게 했던 것처럼 전후 아무런 보장 없이 휴전협정을 맺고, 한국에서 명예롭게 철수할 생각이었다. 월남은 그런 미국의 협박 및 강요에 속절없이 당했고, 미국의 속내를 훤히 꿰고 있던 이승만은 역으로 미국을 이용해 필요한 것을 철저히 받아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경제원조, 20개 전투사단 창설이 바로 그것이다. 월남의 국가지도자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이 쳐놓은 전략적 그물에 걸렸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니 월남에서처럼 미 지상군을 철수시킬 수 없었다. 그럼에도 틈만 나면 북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이승만을 통제하기 위해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이 통제하도록 조치했다. 주한미군이 아예 철수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이승만은 굳건한 한미동맹을 위해 노력했다. 미군 속에 카투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했고, 한국에서 싸운 미군지휘관들에게 갖은 정성을 베풀어 친한파 인사로 만들어 놓았다. 한국을 다녀간 미군 장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승만의 반공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리더십과 애국심을 칭송했다. 이승만은 전시 동안 시간이 나면 국군부대는 물론이고 미국의 육해공군 부대를 다니며 미군지휘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오늘날 한미동맹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그 씨를 뿌리고 잘 가꾸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미동맹이라는 튼튼한 거목이 되어 대한민국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은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살아갈 ‘한미동맹’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줬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최소한 그런 이승만의 애국심과 공로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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