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국 현대사와 함께 한’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릴 만한 인물이다

[新刊 소개] 안병훈 회고록: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

기파랑 칼럼 | 최종편집 2017.04.08 06: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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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刊 소개] 안병훈 회고록: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

올해 팔순을 맞이한 前 조선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안병훈!
그는 ‘한국 현대사와 함께 한’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릴 만한 인물이다.

도서출판 기파랑          
 
2003년 12월 31일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임했다. 조선일보에서 38년 7개월을 보내며 스물일곱 청년이 예순다섯 초로(初老)의 사내가 됐다. 나는 조선일보에서 가장 긴 이력서를 갖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단 한 줄의 가장 짧은 이력서로 충분하다. 수습기자에서 출발하여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마무리되는 동안 내 이력은 단 한 줄 ‘조선일보 기자’였을 뿐이다.

  
안병훈 著 | 무선 150*210 | 612쪽 |
2017년 4월 7일 발행 | 값 30,000원|
ISBN 978-89-6523-697-9  03800

구입문의: 도서출판 기파랑(02-763-8996)

언론인이 쓴 회고록에는 흔히 ‘한국 현대사와 함께 한 몇십년’이라는 식의 부제가 붙기 마련이다. 아니면 회고조의 제목이 붙기도 한다. 특정 서명(書名)을 언급할 수 없어 시(詩)의 한 구절을 차용하지만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같은 제목이 얼마나 많은가.

올해 팔순을 맞이한 전 조선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안병훈은 그런 군더더기나 회고조 없이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는 회고록을 펴냈다. 안병훈 자신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와 함께 한’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릴 만한 인물인데도 말이다.

제목만 보면 시련과 좌절을 극복한 연예인 혹은 정치인이 쓴 에세이집 같다. 아무리 늦춰 잡아도 50대 이하가 쓴 책 같다는 느낌도 준다. 그러나 안병훈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수식(修飾)과 수사(修辭)를 좋아하지 않는 그의 담백한 성격을 안다. 또한 그가 여전히 청춘, 또는 청년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1세, 건강수명은 남성 68.26세(여성 72.05세)라는 최근의 보도가 있었다. 68세가 넘은 한국 남성은 대체로 왕성한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통계겠지만 안병훈은 지금도 출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회의를 하고 일을 꾸민다. 일과 후에도 관계자 미팅을 겸한 저녁 식사라든가, 지인들과 하루를 정리하는 술자리를 반드시 가지며 이때 소주 한두 병쯤은 거뜬히 마신다. 일주일에 5, 6일을 이렇게 보낸다. 이런 ‘신체적인 청춘’보다 관심이 더 가는 대목은 그가 지닌 ‘청년의 정신’이다. 그의 ‘주장’처럼 안병훈은 여전히 꿈을 꾸며 일을 한다. 이 회고록은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일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일을 꾸미고 추진한다. 일의 성공이나 실패는 결국 사람의 역량에 달린 문제다. 안병훈이 추진했던 일의 성공 확률이 높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는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

우선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핵심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만든다. 그가 명명한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p.296부터 관련 내용)는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 ‘정보화에 앞선 나라가 미래를 지배한다’ 같은 구호는 이후의 수식어나 구체화된 언어에 불과하다.

‘산업화는 늦었지만’에 대한민국의 역사가 있고 ‘정보화는 앞서가자’에 대한민국의 갈 길이 있다. 이것이 합쳐져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가 되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사람의 의지, 역사의 추동력이 생기게 된다. 안병훈을 상징하는 말과 다름없는 것이 ‘사람의 의지’, ‘역사의 추동력’이다. 그가 추진한 캠페인과 전시회 등이 다 이와 관련이 있다.

일을 추진하는 안병훈의 다음 단계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가 추진하는 일을 같이 해본 사람들은 그로부터 “당신이 이것 좀 맡아줘야겠어”라는 말을 들은 경험이 있다. 사람들은 안병훈이 쓰는 ‘당신’이라는 단어에서 ‘아, 이 사람이 나를 믿는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되며 그래서인지 혼신의 노력을 다하게 된다. 이런 이상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안병훈의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라는 뜻인, 그래서 ‘도깨비 매(魅)’자를 쓰는 매력이라는 단어로 대치할 수 있다. 

요컨대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는 안병훈이라는 사람이 누구누구와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그 일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점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여러 사람에게 감동과 행복을 주었다고 점도 그러하다. 그가 했던 일은 국가적 아젠더였거나 또는 그에 준하는 규모가 큰 사업들이었다. 또한 그가 했던 일에는 사람이 모였고 성금이 모였다. 왜 그랬을까. 이 책에 그 해답이 있다.

안병훈이 했던 일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회고록 또한, 제1부 기자의 길―‘올챙이 견습에서 편집국장까지’, 제2부 언론의 길―국가적 아젠다를 만들다, 제3부 출판의 길―‘책’을 만들며 ‘통일’을 꿈꾼다, 3부로 구성돼 있다. 이하는 각 부의 간략한 요약이다.


제1부는 기자 안병훈, 편집국장 안병훈을 다루고 있다.

납북된 아버지의 대(代)를 이어 조선일보에 입사한 그는 박한 봉급을 이유로 조선일보 최초의 스트라이크를 주동한 기자였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신문에 내지 못해 ‘동교동’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렇게라도 그의 존재와 역할을 한 줄이라도 내주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중화학공업 추진과 조국 근대화에는 깊이 공감하며  지지했다.

김재규에 의해 정치부장에서 잘린 지 얼마 안 돼 박근혜에 의해 복귀한 일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는 ‘마지막 전별금’을 받았다.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장영자 사건 기사화로 연행됐고,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에는 김일성 사진을 신문에 냈다는 이유로 남산으로 연행돼 고초를 당했다. 편집국장으로서 ‘김일성 사망’이라는 세계적인 오보를 냈고, ‘벤 존슨 약물 복용’이라는 세기의 특종을 냈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관련보도로 한국 언론의 신기원을 이끌었고 가장 행복하고 박수를 받을 때 편집국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조선일보에서 평생의 보스(방우영 회장)와 평생의 배필(박정자 교수)를 만났다는 점이다.

제2부는 ‘국가적 아젠다’를 만들었던 언론경영자 안병훈을 조명한다.
 
편집국장 퇴임 후 국가적 아젠다를 설정하며 환경, 정보화, 역사 바로 세우기 캠페인에 주력했다. 때로는 정치권력과 싸웠고 두 거대 야당과 맞서기도 했으며 북한의 협박과 공갈에도 대항했다. 그 과정에서 안병훈의 사명은 명확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시대의 핵심을 관통한 안병훈의 메시지와 캠페인들’에서 다룬다.


제3부는 ‘책’을 만들며 ‘통일’을 꿈꾸는, ‘청년 안병훈’의 오늘을 이야기한다.
 
조선일보 퇴임 이후 대형서점에 들렀다가 좌편향 일색의 서적들로 판매대가 가득 차 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보수적 가치를 이론화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출판사 기파랑을 차렸다. 10년 넘게 기파랑을 운영하며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배회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  《혁명아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 등 여러 문제적 저작을 출간했다.
2015년 3월 조선일보로부터 강권을 받아 통일과나눔재단 이사장을 맡게 됐다. 그 해 6월 “나눔, 통일의 시작입니다” 캠페인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일은 험난하고 어려운 일이나, 그래도 그는 그 꿈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시대의 핵심을 관통한 안병훈의 메시지와 캠페인들

―“쓰레기를 줄입시다” 캠페인(p.238부터 관련 내용)
안병훈은 한국 언론 최초로 환경 캠페인을 주도해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된다. 조선일보와 그의 주도로 전국에 쓰레기 줄이기 열풍이 불자 정부는 1995년 1월 쓰레기 분리수거 및 종량제를 도입하게 된다. 

―“샛강을 살립시다.”(p.271부터 관련 내용)
‘살리자’라는 말은 ‘이미 죽어 있다’는 뜻을 전제로 한다. 그의 메시지는 간명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었다. 이 캠페인으로 여러 지천(支川)이 살아났다. 일례로 20년 전 악취와 오물이 가득했던 중랑천이 이제는 서울 시민의 휴식처가 된 지 오래다. 안병훈의 말이다.

지금 중랑천에는 물고기가 살고 학이 날아든다. 서울 시민들은 중랑천변에서 산책하고 자전거를 타며 아이들의 재롱을 본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보전하면 사람을 감격케 한다. 이렇게 좋은 것을 그때는 왜 못했던 것일까? 먹고 살기가 바빠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라도 시작했기 때문에 오늘의 중랑천이 있는지도 모른다. 중랑천을 지날 때마다 내가 남모를 환희와 감동을 느끼는 이유다. (p.272) 

―“아름다운 화장실”, “열린 화장실, 열린 마음”(p.287부터 관련 내용)
‘아름다운 화장실’은 ‘따뜻한 아이스커피’ 만큼이나 모순되는 말이었다. 요즘은 해외여행을 나간 한국인들이 외국의 열악한 화장실 환경에 기겁할 때가 있지만 과거엔 한국을 찾아오는 외들인들이 그랬다. “아름다운 화장실” 캠페인으로 지금은 한국 어디를 가도 화장실이 깨끗하고 쾌적한 편이다. 그리고 ‘화장실 인심’이 한국처럼 좋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열린 화장실, 열린 마음” 캠페인 덕분이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p.296부터 관련 내용)  
박정희 대통령의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도 이와 비슷하다. 가난했던 한민족의 역사, 미래의 목표, 사람의 의지, 역사적 추동력이 다 녹아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IT강국이 된 것에는 안병훈의 역할이 적지 않다.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시회(p.327부터 관련 내용)
 “이승만은 한국 근·현대사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거인이었다. 탄생에서부터 개화기의 활약과 투옥, 미국 유학과 망명, 해외에서의 항일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후의 대한민국 건국과 6·25전쟁에서 한 뼘의 땅도 빼앗기지 않고 나라를 지켜낸 호국(護國)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 자체가 곧 우리의 근·현대사였다. 이승만에 대한 부정(否定)은 곧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p.331)
 
―「대한민국 50년 우리들의 이야기」(p.344부터 관련 내용)
안병훈은 대한민국 50년, 그 도전과 성취의 역정(歷程)을 ‘대한민국 50년 우리들의 이야기’ 전시회를 통해 시간과 테마 순으로 장엄하게 재현했다. 전시장은 꼬리를 물고 밀려드는 관람객으로 연일 성황을 이루었고, 한국인들은 그야말로 잊고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에 젖어들었다.


부록

■ 안병훈의 기준들

안병훈 주위엔 사람이 모인다. 머리를 굴리지 않고 담백한 선택을 할 때가 많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선택 기준이 다소 엉뚱해 보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해병대 장교와 공군 장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전자를 택했다.

해병대는 4월 7일, 공군은 6월 1일이 입소일이었다. 하루라도 먼저 군대에 가서 하루라도 빨리 제대를 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직장을 구하는 시간도 짧아지고, 어머니를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 입대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p.32)

어느 쪽이 더 편할까, 이런 것은 그에게는 없는 기준이다. 동양통신이냐, 조선일보냐를 선택할 때는 이런 기준이 작용했다.
 
당시 최병렬과 이상우는 한국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옮긴 이후였다. 이들은 “왜 조선일보 면접에 오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며 동양통신으로 간 것은 잘못됐으니 무조건 조선일보에 오라고 종용했다. 조선일보 면접에 응한 것은 순전히 최병렬과 이상우, 두 친구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선택한 조선일보라면 조선일보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p.22)

박근혜 경선 캠프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하겠지만 박근혜 경선 캠프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도와달라는 부탁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서다. 여자의 부탁이었다. 더구나 박근혜 후보는 김재규에 의해 내가 정치부장 자리에서 물러날 위기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이어진 남다른 인연도 있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도와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p.417)


■‘인간 안병훈’을 회고하다

안병훈의 진가는 궂은일을 떠맡아 솔선수범하는 데 있었다. 어려운 일, 잘 안 되는 일이 생기면 거기엔 어김없이 그가 나타났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화의 보스였고, 타협과 조정의 명수였던 그가 있었기에 나는 늘 든든했다.(p.545)
―고(故)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

어려운 일, 잘 안 되는 일이 생기면, 거기엔 어김없이 안 부사장이 나타났습니다. 관계자와 간부들을 모아 회의를 하고 거기서 중지를 모아 해결점을 찾곤 했습니다. 옆방에서 근무했던 제가 때론 “웬 회의가 그리 많으냐?”고 하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돼”하면서 “당신은 글이나 써”하곤 했습니다. (p.548)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그는 시대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직관을 지녔고 용기와 명예, 정의감에 투철했던 언론인이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자신의 글을 더 이상 쓰지 않았지만 글을 쓰는 모든 후배기자들의 대부가 되었습니다. 밤이면 그를 모시고 앉았던 술자리의 푸근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넉넉한 인품을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가 늘 청년인 줄 알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루하루 진력을 다해 살아온 사실을 애써 모른 체 했습니다.
(p.554~555)
―변용식 편집국장 외 후배기자 일동

 ‘화향백리(花香百里) 인향천리(人香千里)’. 꽃향기는 백리를 가고 사람향기는 천리를 간다는 비유 역시 그래서 나왔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백만 응원군이 ‘인간 안병훈의 향기’에 이끌려 소리 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p.559)
―조양욱 기파랑 편집주간

뛰어난 업무실력뿐 아니라, 그에 버금가는 인간애로 각계각층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의 훌륭한 인품과 넉넉한 손끝은 조선일보 구석구석으로 안 닿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p.563~564)
―김정(金正) 서양화가

안 선생의 말씀에는 무게가 있다. 모임에서는 현안 과제들이 화두에 오를 때가 많은데 정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안 이사장의 입은 무거운 편이다. 그의 박식은 유명하다. 누구나가 그의 말을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상례이다. 안 이사장의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들의 가야 할 길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인상이다. 나뿐만 아니라 동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p.568)
―권이혁 전 서울대 총장, 문교부 장관


■책 속으로

내가 조선일보와 함께 한 38년 7개월은 대한민국 역사와도 맞물려 있다. 이 기간 동안은 대한민국이 가장 발전하고 승승장구한 때였고, 조선일보와 나는 정치권력과 싸웠고, 두 거대 야당에 맞서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를 폭파해 숨통을 끊어버리라는 북한 정권의 협박과 공갈, 반(反) 대한민국 세력이 결집한 ‘안티조선’ 세력의 준동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내가 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p.13)

이때 박 대통령이 우리 두 사람에게 봉투를 주었다. 봉투에는 ‘대성하시라’는 메모와 함께 당시로서는 관행인 전별금이 들어있었다. 이후 10·26이 나고 청와대 출입기자 전별금이라는 관행 자체가 사라졌다. 나는 송효빈 기자와 함께 박 대통령으로부터 마지막 전별금을 받은 기자였던 셈이다. 그때 받은 봉투와 메모는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p.81)

지금 관점으로는 “김대중을 김대중이라고 쓰지도 못하고 동교동이 뭐냐?”고 우습게 볼 수 있
다.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한국 전체 언론과 조선일보의 수치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동교동’이라고 쓰면서 김대중의 존재와 역할을 한 줄이라도 내주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동교동’이라는 표현은 그나마 한국 언론과 조선일보가 언론 자유를 위해 애를 쓴 흔적이다. (p.83)

사실 ‘이원집정부제’라는 용어가 한국 정치계와 언론계에 쓰이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외교·국방은 대통령이, 내치는 총리가 담당하는 제도를 어떤 용어로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헌법학자 김철수(金哲洙) 교수의 저작을 훑어보게 됐고, 거기서 (내가) ‘이원집정부제’라는 적절한 용어를 발견했던 것이다. (p.94)

지면을 보니 기가 막혔다. 그때까지 본, 아니 지금까지 내가 본 김일성 사진 가운데 가장 잘 나온, 가장 잘 된 사진이었다. 윤전기는 이미 세워져 있었다. 김일성 사진은 다른 사진으로 교체됐지만 이미 가판을 보고 들이닥친 안기부 요원들이 그냥 갈 리 없었다. (...) 요원 중의 하나는 “아 이제 알겠다. 북한에서 내려온 최고 간첩이 바로 네 놈”이라며 나를 신문(訊問)했다. 요원들의 손과 발이 마구 들어왔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김일성 사진을 게재한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p.117~118)

연수회는 내가 제안한 <좋은 아침 좋은 신문 조선일보>라는 구호를 편집국 기자들 모두가 열창한 후 회의를 마쳤다. 이 구호는 그 후 조선일보 홍보 문구로 정해지고 광화문을 향한 조선일보사 구관 입구의 대형 전시판에 붙여져 오랫동안 전시, 홍보됐다. 이 밖에도 나는 “신문에도 품질이 있습니다. 조선일보”라는 선전 구호 등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각 지하철역이나 TV를 통해 광고되기도 했다.(p.127~128)

김일성은 이 날 오전 10시 몽골 주석을 영접하기 위해 평양공항에 나타났다. ‘세계적 특종’이 ‘세계적 오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조선일보 1면 제목은 「김일성은 살아있었다」였다. 이 날짜 지면 편집을 마치고 나는 사표를 들고 사장실로 찾아갔다. 방우영 사장에게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큰 실망과 불신을 안겼다. 책임을 지고 편집국을 떠나겠다”고 했더니 방 사장은 “모든 신문이 오보를 했는데…‥더욱 열심히 하라”고 했다. 또 한 번 “미안하고 멋쩍고 고마웠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p.148)

너무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방 회장과 함께 했던 시간이 한국 언론이 가장 빛나던 시기, 구체적으로는 조선일보의 황금기였다는 점이다. 방 회장은 ‘4등 신문’이었던 조선일보를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부동의 1등 신문으로 성장시켰다. 나는 그와 함께 하면서 조연 역할을 약간 했을 뿐이지만 그 기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조선일보에서 기자, 차장, 부장, 편집국장, 편집인, 대표이사를 지냈지만 내 이력은 단 한 줄로 정리가 가능하다. 그것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조선일보 기자로 퇴직하다’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벅찰 정도로 뿌듯한데 더욱이 ‘방우영 시대의 기자’였다는 점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p.155)

특종의 기억은 달콤하다. 기자라면 누구나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특종을 꿈꾼다. 하지만 그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기자 시절 크고 작은 특종도 해보았고, 낙종을 하여 고개를 들지 못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하지만 편집국장으로서 내 평생의 가장 큰 특종, 잠을 못 이룬 채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이룬 특종은 이용호 부장이 건진 「벤 존슨 약물 복용」이었다. (p.179)

10월 2일 저녁 올림픽 폐회식이 열리고, 화사한 불꽃이 서울 밤하늘을 수놓던 그 시간,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나의 뜻을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오래 전부터 굳힌 결심입니다. 편집국장으로서 가장 행복할 때 물러나고 싶습니다.” (p.181)

2003년 12월 31일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임했다. 조선일보에서 38년 7개월을 보내며 스물일곱 청년이 예순다섯 초로(初老)의 사내가 됐다. 나는 조선일보에서 가장 긴 이력서를 갖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단 한 줄의 가장 짧은 이력서로 충분하다. 수습기자에서 출발하여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마무리되는 동안 내 이력은 단 한 줄 ‘조선일보 기자’였을 뿐이다. (p.383)

달과 잣나무가 꿋꿋한 기상과 영원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달은 없어졌다가도 다시 성장해 만월이 되고, 끝없이 회귀한다. 잣나무 역시 겨울을 이기고 늘 변함없이 푸른빛을 가진다. 그렇게 영원한 기상을 가진 기파랑이라면 출판사 이름으로는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p.391)

방파제에 뚫린 구멍을 작은 주먹으로 막는 동화 속 네덜란드 소년의 심정으로 출판을 시작합니다. 이성적인 사고와 비판의식,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자신의 논리를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는 지성적 분위기를 널리 확산하기 위해서는 종이 문자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것이 미력하나마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p.392)

여기서 처음 밝히는 사실이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내게 제의가 들어왔다. 1995년 12월의 어느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며 집무실로 찾아갔더니 김영삼 대통령이 내게 비서실장을 맡아주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일생을 끝내고 싶다, 공직 경험도 없고 비서실장을 맡을 그릇도 안 된다고 완곡히 거절했다. (...)이런 일에 일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장관 등 공직을 제의한 데 대해 거절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썼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줄 지 모르나 그렇다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p.427~428)

나는 결심했다. 우리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나마 통일을 위해 남은 생애를 바쳐보자고 다짐했고, 내 인생의 마지막 봉사라는 각오를 하며 조선일보의 제의를 수락했다. 설립준비금 1천만 원을 1호로 내면서…. (p.453)


■ 저자 약력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정치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편집인, 대표이사 부사장을 지내며 평생을 언론 일선에서 보냈다. 그동안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LG상남언론재단 이사장, 방일영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재단법인 통일과나눔 이사장, 서재필기념회 이사장, 서울평화상 심사위원, 조선일보 이사, SBS문화재단 이사, 한림대학교 이사 등을 맡아 다양한 공익활동을 펼치는 한편, 도서출판 기파랑을 설립하여 이 나라 출판문화와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편저(編著)에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박정희⟫와, ‘젊은 세대를 위한 바른 역사서’로 꾸민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혁명아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가 있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의 대담집 ⟪어느 노정객과의 시간여행⟫을 펴냈다.
 대한민국 동백장(1988년)과 한림과학원 일송상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제5회 일송상(2010년), 통일문화연구원과 매경미디어그룹이 주최하는 ‘올해의 통일문화대상’(2016년), 서울언론인클럽의 ‘이름을 빛낸 언론인상’(2016년),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관악대상’(2017년)을 수상했다.


목차

책을 내면서

 제1부 기자의 길 올챙이 견습에서 편집국장까지

1장 | 대(代)를 이어 조선일보로

두 대학 동기가 친 전보
북으로 납치된 그리운 아버지
서울대 법대 출신이 왜 해병대를…
박봉(薄俸) 타령한 올챙이 기자
‘육탄 10용사’와 짜빈동 전투
조선일보에서 평생 배필을 만나다
신문기자에서 대학교수로 변신한 아내

2장 | 부녀(父女) 대통령과의 인연

첫 스트라이크 주동 기자
기고문 하나로 야기된 3·6 사태
동료 기자 32명, 회사를 떠나다
인화의 보스 방일영 고문
박정희 대통령과의 첫 만남
중화학공업 추진과 유신(維新)
박 대통령의 전별금 봉투

3장 | 정치부장, 사회부장으로 격변을 치르다

‘김대중’ 대신 ‘동교동’이라 쓰던 시절
“김재규가 자른 목, 박근혜가 붙이다”
대통령이 유고(有故)라니?
“안 부장, 요즘 공 잘 맞아요?”
안기부에 끌려가다

4장 | 1등 신문의 편집국장

삼천 배(拜)도 하지 않고 만나 뵌 성철 큰스님
비류백제와 소설「잃어버린 왕국」 연재
김일성이 시켜준 두 번째 남산 구경
동아일보와의 민족지 논쟁
「좋은 아침 좋은 신문 조선일보」 구호 만들어
첫 작업, 21세기 모임
이어령 교수, 워드프로세서로 원고 전송

5장 | 오보(誤報)의 쓴 맛, 특종(特種)의 단 맛

조선일보 지령(紙齡) 2만 호
잠실 주경기장에서 편집국 부장회의 열다
김일성 사망 오보/방우영 회장과 나
여론조사, 신문에 본격 도입
「선생님을 해외로 보냅시다」 캠페인
88서울올림픽 계기로 신문 증면 시작
루드밀라 남(南)과 넬리 리(李)의 서울 공연
세계를 놀라게 한 ‘벤 존슨 약물 복용’ 특종
“행복할 때 물러나고 싶습니다.”


제2부 언론의 길 국가적 아젠다를 만들다

6장 | 꼬리를 문 ‘언론 자유’에 대한 도전

김대중 평민당의 공격을 받다
정주영 국민당과의 싸움
주간조선 기사를 빌미로 소송 제기한 노무현

7장 | 언론 단체에서의 값진 기억들

9대 편협(編協) 회장으로 취임하다
초대 LG상남언론재단 이사장을 맡다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 기사모음 발간
대(大)기자 ‘홍박(洪博)’을 기리며
IPI가 정한 ‘언론 자유 영웅’ 최석채
‘서울대 폐지론’에 맞서 결성된 관악언론인회
서재필 언론문화상 제정과 서재필 어록비 건립

8장 | 대한민국을 바꾼 환경운동

「쓰레기를 줄입시다」 캠페인 시작
서울의 모범 동장(洞長)들부터 설득하다
환경 마크 열풍과 찰스 왕세자 방한
「자전거를 탑시다」
세계를 깨끗이, 한국을 깨끗이
유엔 환경상 ‘글로벌 500’ 수상
국제 환경 저널리스트 대회 유치
물의 중요성을 알린 「샛강을 살립시다」
한강에 모인 세계의 명문 사학 조정 선수들
마이니치신문과 손잡고 한일 국제환경상 제정
월드컵 축구를 앞두고 펼친 글로벌 에티켓 운동
중국도 배워간 ‘아름다운 화장실’ 만들기
히딩크 자서전 《마이 웨이》 출간

9장 | 한국을 정보화 강국으로!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빌 게이츠와 햄버거 오찬
“어린이에게 인터넷을” 키드넷(Kidnet) 운동
동아일보와 함께 벌인 사상 첫 정보화 캠페인

10장 |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아 고구려!」전(展)이 세운 초유의 관람 기록
헐리기 직전의 옛 중앙청에서 연 「유길준과 개화의 꿈」 전시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본격 조명
축사를 하지 않고 전시장 떠난 대통령
“제헌절부터 광복절까지 태극기를 답시다!”
「대한민국 50년, 우리들의 이야기」 전시회
‘김일성의 남침’을 강조한 「아! 6·25…」전
해양화가 한국의 비전임을 일깨운 전시
시민 마라톤의 탄생을 알린 춘천 마라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인형전 「엄마 어렸을 적엔…」

11장 | 다시 언론 자유를 위하여

북한의 광적(狂的)인 ‘조선일보 때리기’
진실로 판명된 「공산당이 싫어요」 기사
세무 조사의 탈을 쓴 조선일보 탄압
영광과 보람의 ‘조선일보 기자’ 38년 7개월


제3부 출판의 길 ‘책’을 만들며 ‘통일’을 꿈꾼다

12장 | 기파랑(耆婆郞)에 담은 ‘달’과 ‘잣나무’의 영원함, 꿋꿋함

서점가에 넘쳐나는 좌편향 출판물
샘터사 사옥에 둥지를 틀다
올바른 역사 교육 지침서 《대안(代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배회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긴급 출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집중 조명하다
박정희, 위대한 혁명가의 참모습
박근혜 경선 캠프 참여와 7인회
반기문(潘基文) 유엔 사무총장과의 만남
YS의 청와대 비서실장 제의를 거절하다

13장 | 나눔으로 통일을 앞당기자

아버지의 유산(遺産)
기파랑 창립 10년, 다시 샘터사 옥상에 서서
어느 노(老)정객과의 시간여행
호시우보(虎視牛步)의 11년, 작은 기적을 이루다
이색 여행기에다 언론 동료들의 저술까지
물심(物心) 양면으로 도와준 은인(恩人)들
마지막 봉사, 새로운 시작 ‘통일과 나눔’ 운동

부록 귀한 만남, 소중한 인연

화보 : 내가 만난 사람들

조선일보 사람들과…
정·관계 지도자들과…
외국 정상들과…
경제계 리더들과…
역사에 기록될 세계적인 인사들과…
편협·서재필기념회·통일과나눔 행사에서…
시상식, 전시회 등 행사에서…
각계 명사(名士)들과…
시상·수훈식에서…
지인(知人)들과…
가족, 소중한 생의 반려(伴侶)
내가 본 안병훈, 내가 만난 안병훈
정보부가 뗀 목 청와대가 붙이다_방우영·조선일보 상임고문
‘설거지 주부’를 떠나보내며_김대중·조선일보 주필
“청년 안병훈의 넉넉한 인품 못 잊을 겁니다”_변용식 편집국장 외 후배기자 일동
사람의 향기는 천리(千里)를 간다_조양욱·기파랑 편집주간
전설이 되어버린 조선일보 5인_김정(金正)·서양화가
안병훈 서재필기념회 이사장_권이혁·전 서울대 총장, 문교부 장관
인화의 보스 안병훈_《조선일보 사람들》 수록
가족 코너
아버지가 주신 풍요로운 훈육(訓育)_아들·안승환(安承煥)
60점 아빠, 10점 남편, 100점 언론인_딸·안혜리(安惠利)
기자 3대 ‘조(朝) 2 중(中) 1’ 따뜻한 신경전_딸·안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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